선생님들 그리고 선배님들 후배님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졸업한지 벌써 2년차가 되어가는데 얼굴 모를 후배님들도 많이 들어왔겠군요.

 

3월인데 눈도 오고 통장 잔고는 점점 0으로 향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산 목숨에 거미줄 치겠나 하는 심정으로 버텨가고 있는 요즘입니다.

 

출판 쪽에 발 하나 걸치고 있는 상황이긴 한데 아무래도 번역 쪽으로 발판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자력갱생 중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감독 오시이 마모루의 짤막한 평론을 모아둔 『평범한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란 책에서

 

「승패론 -  승부는 단념했을 때 패배가 결정된다 」라는 글 토막을 남기고 갑니다.

 

저를 비롯해서 '지금이 힘든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분들께 전하고자 합니다.

 

그럼 모두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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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승패론 - [승부]는 단념했을 때 패배가 결정된다


실패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의 성질상 나는 많은 젊은이와 접하는 기회가 있지만 부득이하게 그들을 관찰해서 알아차린 것은 지금 젊은 남자들은 능력이 있는 녀석도 없는 녀석도 모두 극단적으로 실패를 두려워 한다는 것이다.

 

능력 있는 젊은이는 실패를 두려워한 나머지 제삼자의 입장에서 봐도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꾸 일한다. 마치 죽을 기세로 일하면 실패를 피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것은 결코 건전한 발상이 아니다.

 

물론 근면함은 실패할 확률을 낮추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실패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실패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몸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실은 실패 여부의 분기점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 사람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 무엇이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것인지 말하자면 대부분은 주변 상황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감독이란 일을 하고 있으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아무리 출중한 작품을 세상에 발표하여 평가를 구하더라도 타이밍이 나쁘면 크게 실패한 작품이 되는 일은 있다.

 

역시 나 자신도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실패의 연속이었고 실패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옛날에는 실패해서 기가 죽거나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없어졌다. 완전히 실패를 피하는 것은 지금도 불가능하지만 실패했을 때의 대처법은 능숙하게 익히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처음 영화감독을 맡았던 때부터 갑작스런 대실패였다, 첫 감독을 맡은 작품은 예산도 시간도 없는 와중에 버둥거리면서 필사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영화감독이라고 불린 것은 기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막 완성된 자신의 작품을 보고 끔찍하게 엉망임에 화가 나서 홧김에 술을 마시고 뒤엎어버렸다. 원작 팬에게는 평판이 좋았다고 들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다.

 

요컨대 그 작품은 ‘오시이 마모루’(押井守)의 작품이 아니었다. 원작이나 원작의 팬을 배려하고 캐릭터에 신경을 쓰는 등 모든 면에서 염려하여 만든 단순한 팬 무비였다. 영화란 그것을 찍은 인간의 정열이나 어찌할 수 없는 생각이나 정념 등 그러한 것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다음은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려고 생각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자신은 영화감독으로서 폐업이라고 결심하였다. 그런 생각으로 찍은 것이 『시끌별 녀석들 2 - 아름다운 몽상가』였다.

 

이 작품은 운 좋게 평판도 좋고 이럭저럭 폐업을 면했던 것이지만 기분이 좋았던 당시의 나는 ‘역시 자기가 만들고 싶은 영화만 만들면 좋구나’라는 뜻을 굳혔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 때 얻은 성공이 다음에 찾아온 대 실패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 후 만든 작품은 만들 때마다 ‘이유를 모르겠다’라고 호된 비판을 당하고 흥행도 나빴고 머지않아 나에게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어져버렸다.

 

나는 세상을 쉽게 보고 있었다. 세상이란 것은 무서운 것이기에 얕보면 반드시 뼈아픈 꼴을 당한다. 당시의 내가 정말로 그랬다.


내가 실패에서 배운 것

 

‘세상은 쉽지 않다’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나는 그 말에 이의를 가지고 있다. 세상은 때로 냉엄하거나 때로 만만하기도 하다. 그저 냉엄하기만 한 세상이었다면 묵묵히 견실하게 살아가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때로 세상은 굉장히 만만하게 되는 일이 있어서 그런 때는 승부할 때다. 다만 그 판단이 어렵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하건 세상을 얕보아서는 안 되지만 나는 그것을 몰랐다.

 

그렇지만 그 당시 겪은 실패에서 내가 배운 것은 많다고 생각한다.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영화는 절대로 만들고 싶지 않다. 하지만 타인에게 평가 받지 않은 영화를 만들어서야 그것은 그저 자위행위이다.

 

오른쪽으로 지나치게 가서 실패하고 이번에는 왼쪽으로 지나치게 가서 실패했다. 양극단의 길에서 두 번씩이나 실패해서 아아, 뭐지 중간을 가면 괜찮은 건가? 하고 간신히 알아차릴 차례였다. 그러니까 한동안 업계에서 일거리를 받지 못한 후 다시 영화를 찍을 기회가 찾아왔을 때 이 당시의 실패를 밑천으로 나는 중간의 길을 걸었다.

 

나는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히트 작품이란 것을 만든 경험이 없다. 나 이상으로 흥행에 성공한 영화감독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그 대신에 나는 내가 찍고 싶은 영화를 계속 찍고 있다. 크게 흥행한 적은 없지만 이런 내게 작품을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의뢰는 다행히도 계속해서 날아들어 온다.

 

그런 식으로 나도 날아들어 오는 일을 맡는다. 다음 작품이 어쩌면 대 실패작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겨우 그 한 편이 이제까지 내가 쌓은 공을 전부 날려버리는 작품이 될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도록 전력을 집중해서 나는 영화를 찍는 것이지만 그래도 완전히 실패할 가능성을 없애는 것 따위는 가능할 리가 없다.

 

그래도 나는 승부에 나선다. 왜냐. 나는 승부를 포기한 때야 말로 승부에서 지는 때라고 알았기 때문이다.


승부를 계속하면 지지 않는 시스템이 몸에 익는다

 

승부를 계속하는 한 패배는 정해지지 않는다. 이기거나 지거나 하면서 인생은 계속되어 간다. 다만 승부를 계속해가는 동안에 점점 승부에 대한 감이 뒤따라오고 쓸모없는 실패는 하지 않게 되어간다. 기술이 늘어가기 때문이다.

 

영화의 이야기로 말하면 나는 영화제작의 시스템에서 커다란 실패를 하지 않을 수단을 꾸며 넣었다. 그것은 ‘타인과 일을 한다’는 것이다. 타인이란 객관성을 영화제작 현장에 갖고 들어오면 독선적인 작품을 만드는 쪽으로 폭주하는 것을 그들이 막아준다. 그렇게 나는 우수한 녀석하고만 협동하니까 나 혼자서 무엇이든 생각해서 내놓은 것보다도 계속 영화의 질은 높아지는 것이다.

 

승부를 계속하면 생각지 않은 성과가 날아들어 오는 경우도 있다. 예전에 패배했다고 굳게 믿은 승부에서 나중이 되어 이긴 적이 있다. 내가 겪은 일을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우직하게 영화를 계속 찍어서 어느 정도 평가를 얻는 동안에 예전에 전혀 가치가 없다는 말을 들었던 작품에 빛이 닿아서 재평가 받는 경우도 있다. 흥행성적은 상승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갑자기 비디오가 팔리기 시작하기도 한 적도 있다.

 

그러니까 절대로 승부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단, 항상 승리를 노리는 것은 금물이다. 승부를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지만 반드시 이긴다, 절대로 실패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적극성을 지니면 긴장감이나 강한 의욕 등 부질없는 것을 짊어지고 결과적으로 패배한다.

 

앞에서도 썼지만 일반적인 평가로 말하자면 나는 영화감독으로서 단 한번도 ‘이겼던’ 적이 없다. 아무튼 크게 흥행한 작품도 없고 변변한 수상 경력도 없는 영화감독 따위가 일반적으로는 ‘승리한 감독’일 리는 없다.

 

그럼에도 영화감독으로서 어느 정도 이룬 바를 평가를 받아서 일의 의뢰가 끊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승부에서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 했던 대로 영화제작의 현장에서 타인을 끌어들이는 방법도 내 나름대로 생각한 ‘지지 않는 시스템’의 하나다.

 

이런저런 지혜를 구사하여 나는 일단 ‘지지 않는 감독’은 되었다. 나로서는 내 인생을 멋대로 ‘불패신화’라고 부른다. 내 불패신화다. ‘평소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지 않는 것’을 노리도록 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구상을 정리해도 불패신화라고 말해도 나도 언젠가 승부에 지는 일은 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래도 승부를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학을 지니고 승부에 맞서라

 

『이름도 없이 가난하고 아름답게』(마쓰야마 젠조 감독, 1961년, 도호 영화사)라는 영화 제목 정도는 젊은 사람이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영화가 예전에 있었다. 그것은 가난했던 시대의 일본인이 지닌 기분을 잘 표현했다. 명성도 돈도 없지만 사람에게 부끄러움 없이 바르고 아름답게 살아간다는 일본인의 마음이 담겨진 제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현대 일본에서는 ‘명성’ ‘돈’ 그리고 아름답게 산다는 ‘미학’의 3요소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가면 좋은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문제는 미학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명성과 돈은 상대적인 평가다. 훌륭한 사람이라 해도 얼마나 훌륭한가라는 문제가 있다. 회사 사장이 훌륭한가? 국무대신이, 의사가, 아니면 영화감독이 훌륭한가?

 

부자라고 한들 빌 게이츠 정도의 큰 부자부터 작은 부자까지 여러 사람이 있고, 여기서부터 앞으로는 부자라는 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미학만큼은 어디의 누구라도 비교할만한 것은 아니다. 미학은 본인만의 것이자 자신이 사는 방법이 아름다운지 어떤지는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제 1장에서도 썼던 대로 자신만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IT버블로 크게 이익을 얻은 후 위신이 실추되었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어째서 실패했던가 하면 돈을 목적으로 해버렸기 때문이다. 사업을 시작했던 초기에는 모르지만 그들은 미학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소중한 것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 길을 그르쳤다.

 

미학을 관철하면 어느 사이엔가 명성이나 돈은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일에서 성공하면 결과적으로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부와 명예를 얻는 것만 목적으로 해서는 길이 어긋난다.

 

내 경우를 말하자면 내가 아무리 해도 양보할 수 없는 한계는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영화는 절대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흥행에서 크게 실패한다. 즉 돈을 잃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작품이 혹평당하는 것도 무섭지 않다. 그런 경험은 이제까지 몇 번이고 해왔다. 즉 영화 제작을 통해서 부나 명예를 얻으려 하는 마음은 나에게는 정말로 없는 것이다.

 

내가 신경 쓰는 것은 자기 자신이 평가할 수 있는 작품이 되었는지 어떤지, 그 하나뿐이다. 자신의 미학에 딱 맞아 떨어지는 작품이 만들어지는지 어떤지가 중요하고 또 그것 자체가 내 미학이 되었다.

 

다만 그 결과로서 완성한 영화를 많은 사람이 봐주었으면 하고, 흥행했으면 하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칭송받는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기쁘다. 어딘가의 영화제에서 상을 준다고 하면 감사히 받는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그것을 목적으로 해서 영화를 찍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내 멋대로 자기만족을 위한 작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영화제작 시스템에 타인을 넣어서 타인의 의견이나 재능을 취하면서 제작을 진행하는 것으로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의견에는 마음을 비우고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에 현장에서 황제처럼 행동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포함해서 이것이 내가 영화를 만드는 본질이다. 이것이 아니면 내 미학에 들어맞는 작품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미학’이란 물론 자신이 정하는 규칙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허용하면 무엇이라도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전에 내가 자기 멋대로 영화를 만들어서 뼈아픈 실패를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그때는 ‘내 멋대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내 나름대로의 미학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세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미학이란 것은 스스로 정하는 길이라도 자기 멋대로 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미학이 사회적으로 인지 또는 공인 되는지 여부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타인에게 돈을 속여서 뜯어내는 것이 미학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해서 그런 것은 미학도 무엇도 아니다. 자신의 기준은 필요하지만 자기 멋대로 믿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자신의 미학이 이치에 맞는지 아닌지는 점검할 필요가 있다.

 

내 경우는 그리고 나서 누구에게라도 일의 의뢰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이거 위험한데’라고 하게 될 것이다.


상처 입기 전에 해야만 하는 것

 

자, 여기까지는 주로 직장에서 벌이는 승부에 관해 이야기 해왔지만 여기서 이야기 하려는 승패론은 연애에서도 유효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절대로 승부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계속 이기는 것을 노려서는 안 된다’

 

승부의 2대 원칙은 그대로 연애에도 적용된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면 일단 어택 해야만 한다. 물론 그때는 퇴짜 맞을지도 모른다. 거절당하면 우물쭈물 상처 입기 전에 그 여자와 친구라도 되면 좋다. 이것으로 이 승부는 일단 보류. 다음 연인 후보를 찾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해서 승부를 계속하면 거절당한 여자에게 다시 어택 할 기회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예전에 실패한 원인을 분석하고 개선해서 다음에는 끈질기게 설득하여 납득시킬지도 모른다.

 

다만 일과 연애에서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도 있다. 일의 경우는 객관적으로 평가받는 장치가 있다. 그것은 소비자의 평판이나 손님의 반응이거나 상사의 사정평가거나 심사위원의 비평이거나 하겠지만 연애의 경우는 심사위원도 소비자도 없다. 당사자들이 자기평가를 주고받는 수밖에 없다. 수입도 있고 사회적으로도 평가받고 성실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하는데 “당신은 연인으로서 보이지 않아”라고 무참하게 대접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 자신을 거절한 상대가 어떤 훌륭한 상대를 연인으로 선택하는가 하고 관찰하고 있으면 대수롭지 않은, 어떻게 생각해도 일반적으로는 자기보다 뒤진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구제불능인 인간과 눈이 맞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다.

 

이 부조리야 말로 연애가 재미있는 점이다. 일은 사회성 안에서 성립하지만 연애는 그렇게는 안 된다. 당사자 간의 관계성 안에서 부조리한 방법이 성립한다. 애초에 일과 연애는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평가 시스템이 전부 다르다.

 

인간이란 것은 자기실현의 방법으로써 언제나 타인에게서 평가를 얻고 싶어 하는 존재다. 그러니까 사회성 안에서 평가(=일)과 당사자 간에서의 평가(=연애)라는 두 가지 기준에서 이루어지는 평가 중에 어느 쪽 하나만으로는 좀처럼 만족할 수 없는 것인 셈이다.

 

“나는 일 만으로 충분해”라는 녀석은 단순히 움츠러들고 있는 것뿐이고 “나는 여자만으로 충분해. 사랑으로 산다”라는 녀석은 거짓말을 하게 마련이다. 보통은 양쪽, 연애 상대에게 절대평가와 사회에서 상대평가를 받아서 겨우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연애 상대가 일에만 매달리고 있으면 “상대는 내가 내리는 평가보다 사회가 내리는 평가를 우선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을 싹틔우게 된다. 거기서 “나와 일, 어느 쪽이 중요한 거야?” 하고, 그야말로 상대에게 어느 쪽인지 선택 할 수 없는 불합리한 양자택일을 요구하거나 하는 것이다.


일과 연애의 차이

 

일과 연애 사이에는 평가 시스템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노력에 따라서 일에서 성공하는 확률을 높이는 것이 가능하다. 때로는 노력이 일에 대한 평가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연애는 노력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차라리 노력이 성공할 확률을 떨어뜨리는 경우마저 있다.  연애를 성취하려고 집요한 어택을 반복하면 “끈길기네” 하고 점점 혐오당하는 원인이 되기 십상이다. 혹은 노력과는 상관이 없는, 별 볼 일 없는 남자가 좋다는 여자도 실제로는 있다.

 

일과 연애의 차이라면 또 하나가 있다. 일은 해치워 가는 동안에 능력치가 향상해서 능숙해지지만 연애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연애는 언제나 누구나가 초심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경험치가 자라지 않는 것이 연애의 재미있고도 어려운 부분이다.

 

물론 거절당해도 꿈쩍하지도 않게 된다거나 얼굴 가죽이 두꺼워진다거나, 그러한 면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경험에 의해서 연애 성공률이 올라가기는 어렵다.

아지씨가 되면 경제적인 여유가 생겨나서 그것에 의한 성공률의 향상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신체적으로 젊음은 잃게 된다. 한편 젊은 것은 상대의 기분을 헤아릴 여유가 없거나 해서 언제나 파라미터는 변동한다.

 

얼굴이 괜찮으면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얻을지도 모르지만 연애는 1대1의 관계로만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소중한 상대에게 있어서 선호하는 얼굴이 아니면 끝이다. 실제로 선호하는 얼굴의 취향 따위는 십인십색. 얼굴만 밝히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연애에 유리함이나 불리함 따위는 없다고 해도 좋다.

 

여자가 남자에게 끌린다. 혹은 남자가 여자에게 끌린다. 이 행위는 어쩌면 본인으로서도 설명할 수 없는 심오한 것이다. 본능에서 기인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자라난 환경에 따른 것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설명이 불가능한 세계다.

 

“그대는 이러한 인간이고 나는 이러한 인간이다. 그러니까 그대와 내가 눈이 맞으면 최고의 한 쌍이 될 수 있다”라고 상대를 설득한들 그녀, 혹은 그가 납득할리는 없다. 사람에 따라서 “대담하게 해서 강직하고 굽힘이 없음”으로 보이는 성격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단순히 조잡한 녀석”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

 

“반한 여자의 제멋대로인 점이 귀엽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멋대로’니까 반한 것은 아니고 반했으니까 제멋대로인 구석도 귀엽게 여겨질 뿐이다. 반한 이유는 실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지 않는 젊은이

 

더욱이 연애의 잔혹한 점은 결과가 전부라는 것이다. 일이라면 대성공부터 대실패까지 여러 단층이 있지만 연애는 ‘OK’냐 ‘미안합니다’냐 둘 중 하나다.

프로 스포츠 등의 승부의 세계는 엄격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프로야구라면 우승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페넌트 레이스를 2위로 끝내는 것과 6위로 끝내는 것에는 제법 의미가 다르다.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도 성공한 정도가 다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상대와의 연애 게임에서는 그런 상대성은 없다. 사랑의 레이스에 2위도 6위도 없다. ‘예선 2위 통과’도 ‘2승 3패 1무’도 없다. 있는 것을 1위뿐. ‘1승 ○패’냐 ‘○승 1패’냐 어느 한쪽의 절대평가인 세계다.

 

그렇지만 냉혹하다고 해도 고작해야 남녀 간의 연애 문제다. 거절당했다고 해도 함부로 죽을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지금 젊은이들은 보고 있으면 일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연애도 극도로 실패를 무서워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스튜디오에서 근무하는 여직원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와 동세대의 젊은 남자는 대하기 싫다는 사람이 제법 있는 것에는 놀랐다.

 

어째서 대하기 싫은가 하면 요즘 젊은 남자는 자기 쪽에서 “사귀고 싶다”라고 절대로 말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좋아합니다”라고 여자 쪽에서 고백받기를 한결같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 태도가 싫다는 여자가 많은 것이다.

 

남자 쪽에서 보자면 어설프게 여자에게 교제를 신청해서 만약 거절당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하게 되는 모양이다. 요컨대 상처입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거절당해서 아픈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연인 따위 없어도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인 것이다.

 

요즘 젊은 남자를 관찰하고 있으면 공포에 묶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 주눅이 들어있다. 상처 입는 것이 무섭다. 실패하는 것이 무섭다.


실패도 좌절도 없는 인생은 재미없다

 

물론 연애에서는 성공보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다. 그러니까 많은 남자는 이 싸움에서 패하게 되고 젊은이는 그것이 무서울 것이다. 그 중에는 과감하게 도전하는 자도 나타나겠지만 훌륭하게 거절당한 결과 상처 입은 사람도 있다. 그런 남자가 무엇을 하는가 하면 “저 여자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라는 묘한 이유를 붙여서 자신을 위로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진심으로 상대를 좋아하게 되었던 것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불행하게 해서 연애에서 패배했다면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괜찮아. 분명히 나는 거절당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나 자신의 일반적인 평가와는 전혀 관계없다. 반성해만 할 점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정적인 원인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상대편의 여자도 어째서 거절했는지조차 설명도 못 할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나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반했다. 이 기분만큼은 틀림없었던 거다.

 

이러한 식으로 생각하면 상처 입은 것이 모두 시시하게 될 것이다. 이 게임은 노력만으로는 어쩔 수 없다. 결과는 부조리하다. 신인지 우주의 위대한 존재인지 누구의 조종인지는 모르지만 무언가의 보잘 것 없고 대수롭지 않은 변덕으로 승패가 결정된다고 한다면 실패를 무서워하는 것는 바보스럽게 느껴진다. 실패를 두려워해서 쓸 수 있는 수단을 내놓지 않고, 뻔히 보이는데도 미적대서 성공 확률을 떨어뜨리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다고 밖에는 말할 도리가 없다.

 

언젠가 분명 근사한 연애가 저쪽에서 다가온다. 처음으로 만난 상대와 서로 보는 순간에 빠직 하고 전기가 통해서 엮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고 손가락만 빨면서 기다리고 있을 뿐인 인간은 삶을 유보하고 있을 뿐인 인간이다. 그 인생에는 실패도 좌절도 없다. 그 대신에 살아있다고도 할 수 없다.

 

인생은 영화 같은 것이다. 물론 실패도 좌절도 있다. 그것을 피해서는 지나갈 수 없다. 오히려 실패나 좌절이 인생의 진정한 맛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아무런 파란이 일어나지 않는 지루한 영화를 보고 싶은가? 엔딩은 모른다. 꼭 해피엔드로 끝난다고만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어떤 결말을 맞이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전부를 유보한 삶의 방식보다 훨씬 더 그것은 풍부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1장에서 ‘젊음에 가치는 없다’고 말했다. 젊은이는 아직 인간으로서 발전도상에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젊은이에게는 분별이 없다. 그러니까 젊은이는 막무가내였다. 그것을 가치라고 부를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젊은 혈기의 소치’라고 하는 대로 최소한 옛날 젊은이는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했다.

 

지금 젊은이는 그런 무모함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철이 든 것이 아니다. 철이 들어서 아저씨가 된다고 하는 것은 사물 판단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옛날 젊은이는 판단할 수 없으니까 무엇이라도 무분별하게 손을 뻗어 도전했다. 그리고 몇 번이고 실패하고 거기서 배웠다. 지금 젊은이는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은 같지만 무엇에 대해서도 손을 대지 않게 되었다.

 

이래서는 배울 기회조차도 스스로 방기해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평생 아저씨도 되지 않고 나이만 먹어가는 것으로 정신은 언제까지나 밋밋하고 기복 없는 젊은이인 채로 있게 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일이고 연애고 간에 자꾸자꾸 실패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실패를 하면 패배한 원인을 착실히 분석하는 것이다. 두 번씩이나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한다. 그렇지만 다음 승부에서는 다른 원인으로 패배할지도 모른다. 그 다음도 또 다른 이유로 패배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몇 번의 연패, 수 십 번을 연패해도 좋지 않은가? 몇 번씩이나 지더라도 승부를 계속 하는 한 언젠가 분명히 한번은 이길 수 있는 날이 온다. 그리고 조금씩이라도 승점을 올려 가면 최종적으로 인생의 성취표를 승리로 가득 채워서 끝내기가 가능할 것이다.

 

결국은 죽을 때까지 승부를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 마지막에는 웃게 되는 것이다.